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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 박노자

by 융커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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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미숙하고 방황하던 20대를 보내며, 써놓은 독후감입니다. 블로그로 옮기면서 교정과 수정, 편집을 거쳤으나, 특별한 통찰이나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책 소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본문 내용 및 감상

 책을 읽고 저자에게 흥미가 생겨서 조사해 보았다. 1973년 소련에서 태어난 그는 90년대 초에 한국으로 유학한 뒤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한국의 민족주의, 파시즘의 모순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르웨이를 건너가 지금은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 어렸을 때는 공산 소비에트 연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실체를 경험해 보았고, 한국으로 유학하고 귀화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정통하면서도 제 3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진보(좌파)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모순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노자가 이 책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박노자보다 앞섰지만 나는 단재 신채호가 가장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라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은 정신인데 이것은 바로 노예정신이다.’ 박노자가 이 책에서 한국의 여러 가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고 자는 말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한국의 일반 국민들은 아직 노예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강한 자(혹은 그룹)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사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나 역시 더 좋은 쪽에 소유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이렇게 낮은 주체성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어떻나 사건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우리가 말하는 윗사람들은 국민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정확한 Factor가 아닌 그럴듯한 이미지로 유혹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군사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순신이 미화되었고,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화되고 있다. 반대 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미화한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확한 내용은 빠져있다. 그저 구국의 해군제독,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사람 사는 세상을 대통령. 아직 국민들 대다수에게는 이런 것이 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고마웠던 것은 기존에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주고,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던 것을 정확히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이 책도 다른 비판서들과 같이 대안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제 3자의 시각에서, 또 진보(좌파)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를(혹은 동아시아사를) 비판한 것은 높이 사줄 만 하지만, 결국 또 지나간 과거를 검증한다는 것이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그저 이런 식은 어떨까?’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대안은 없을까? 박노자가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한국의 문제들. 순혈주의, 폐쇄적 국가주의, 특정인물에 대한 우상화, 다른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혹은 열등감),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아직도 죄고 있는 이데올로기, 사회 전반에 뿌려져 있는 군사문화(횡적구조), 아직도 본능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수유물로 생각하는 남성우월주의, Factor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좋고 나쁨을 정해놓고 하는 역사교육까지, 나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방법론이다. 일단 지금은 과거와 같은 혁명이 불가능하다. 과거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베이비부머 세대와 486세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젊었을 때는 이들의 숫자가 대한민국의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뭉쳐서 데모를 한다면 그것은 국민 상당수가 하는 것이었고, 또한 많은 국민들이 공감을 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10~20대의 숫자는 인구구조에서 소수를 차지한다. 절대 혁명을 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만약 혁명을 하겠다고 들고 일어난다면 전경들이나 군인들보다 그 혁명을 반대하는 다른 일반 국민들에게도 막힐 숫자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과거와 같이 급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제점을 보자면, 첫째는 교육이다. 우리 나라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서로 비교하는 경쟁이 당연한 것이고, 답을 정해놓은 교육을 한다. 비교 경쟁이 나쁜가? 아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나 역시 인간이 지상 최강의 동물이 된 이상 인간끼리의 경쟁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가 주체적으로 성립이 되었을 경우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잘 되는 것에 박수를 받는다. 이것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하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감을 느끼도록 자라나게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떠한 Factor를 알려주고 그것에 대한 토론으로서 주체적인 생각을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내놓은 것을 주입시킨다. 그래서 주입식 교육이다. 이것은 애들이 생각하는 기회를 빼앗아가면서, 이것이 비교 경쟁과 맞물리며 누가 더 잘 주입받아 다른 사람보다 더 시험을 잘 치는 것이 중요한 교육시스템이 생겨버렸다.

 

 둘째는 위와 같은 교육을 받고 나와 진출한 사회의 획일적 구조이다. 사람을 만나면 단 한 살이라도 많으면 존댓말을 쓰고 당장 회사에 입사하면 바로 선후배가 생긴다. ‘왜 그런 것일까?’라고 질문하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이 길들여져 왔기에 그저 그렇게 따라간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부적응자로 대우받아서 조직에서 왕따가 되기 쉽다. 이러한 문화는 군사정권 시절에 상명하복의 획일적 문화가 사회전반으로 퍼지면서 단순히 윗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복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어떠한 아이디어라도 윗사람의 마음에 들어야만 통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라인이라는 조직 내의 정치를 만들고, 결국에는 다양성(혹은 창의성)을 죽이는 것이 된다. 이것이 남한보다 훨씬 심한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수령유일체제로 인하여 어떠한 다른 생각도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수령만을 쫓는 사회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두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남을 통해서 나를 본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 어떠한 조직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종하고 복종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함을 느낀다. 그래서 아직 한국에서는 우리끼리의 순혈주의, 사대주의, 남성우월주의, 획일적 시스템 등이 통한다. 이것을 해결 위해서 국민 스스로 라는 주체성을 높여야 한다. ‘를 높이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서로간의 치열한 경쟁이 아니라, 답을 정해진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토론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장했을 때, 그 아이들이 사회주체가 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노예정신은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소위 말하는 윗사람들은 두리뭉실한 이미지 혹은 우상을 가지고는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없을 것이고, 정말 존재하는 Factor가 아니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 주체로서 살아간다면 남성우월주의나 이미 다른 곳에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이데올로기 논쟁 따위는 이 땅에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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