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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 주경철

by 융커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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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미숙하고 방황하던 20대를 보내며, 써놓은 독후감입니다. 블로그로 옮기면서 교정과 수정, 편집을 거쳤으나, 특별한 통찰이나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책 소개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본문 내용 및 감상

 흔히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는 중세사회까지는 아시아문명이 우세하다가 대항해시대에 들어서면서 우월한 유럽문명이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고 배운다. 항상 배울 때 이러한 것을 당연히 여겨왔으며, 틀렸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맞다고 생각하더라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이 책은 단호히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존에 배운 역사는 철저히 서구문명(유럽문명) 중심의 역사라고 말한다. 실제로 역사는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단순히 선진문명으로부터 후진문명으로의 전파가 아니다. 정말로 무수히 많은 것들이 서로 얽히고 얽혀서 만들어 내는 것이 역사이다.

 

 유럽은 15세기 바다로 나가기 시작한 이유는 철저할 정도의 이윤을 위해서이다. 특히 가장 먼저 시작한 포르투갈의 경우에는 유럽사회에서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유럽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세계 곳곳에 유럽의 선박보다 훨씬 강한 해군을 보유한 나라들이 득실거렸으며, 유럽의 상인들은 칼로 밀어붙여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들을 만나서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로서 그 상호교류를 유지해야 했다. 섣불리 칼을 먼저 들이댔다가 전멸하는 것은 항상 유럽의 선박들이었다. 그만큼 근대 초기의 유럽의 세력은 약했다. 실제로 유럽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차지히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이다. 19세기말 1만 명의 말리 전사들이 사망했지만 고작 40명의 영국 군인들이 사망한 옴두르만 전투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때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나온 것과 같은 기관총이 사용되었다. 즉,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근대사회의 승리자는 결국 유럽이었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떻게 승리자가 가능했을까? 합리와 종교의 조화이다. 합리는 이성이다. 이성은 효율이고 효과였다. 유럽인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이 도착한 다른 문명들의 전투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많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상대를 죽이는 것보다 상대를 노예로 잡는 것이 목적인 전투, 상대방에게 우위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투, 전쟁 그 자체가 의식이고 축제인 전투 등등, 이러한 전투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던 유럽의 총과 칼에 게임이 되었겠는가? 게다가 유럽인들의 총과 대포를 들여와서 유럽인들과 맞붙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철저할 정도로 효율적인 전술을 펼치는 유럽인들 앞에 다른 문명인들은 견뎌내기 힘들었다. 이런 폭력의 팽창과 수출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지역에는 황폐화와 인간의 상품화를 가져오고 유럽 자체 내에서 평화를 가져왔다. 물론 세계 1,2차 대전으로 크게 터졌지만, 사실 노예제를 유럽인들만 한 것은 아니다. 노예제는 고대로부터 있었으며, 아프리카 노예들의 수출은 아프리카 경제의 한 부분이었다. 단지 기존의 노예제는 '하인'이라는 개념이었으나, 근대에 철저히 효율성과 효과성을 따지는 합리가 정착된 후에는 노예는 그저 상품이었다. 또한 그러한 합리 정신과 같이 뿌려졌던 것이 크리스트교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게 크리스트교와 합리는 반대되는 것이 많았지만 근대사회에서 두 패러다임은 서로 손을 잡는다. 종교는 군사적 힘을 가졌고, 군사행동은 너무나도 종교적이었다. 크리스트교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근대사회에서는 유럽인 스스로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각종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 이후에 군이 개입하고, 그다음 상인들이 와서 착취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가 이 책을 읽은 것도 어찌보면 서구사회의 문명 덕분일 수도 있다. 책, 인터넷, 그리고 그 외에 정말 다양한 문명의 이기들, 하지만 어째서 점점 생물의 다양성은 줄어들고 있고, 새로운 전염병은 계속 발견되고 있고, 전 세계의 문화는 하나둘씩 그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가. 합리적 폭력성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근대팽창시기는 참으로 무섭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다른 문명의 팽창과는 그 범위를 달리 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던 그것의 결과물로서 우리는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결론을 내보자. 누군가 나에게 정치적으로 진보냐 보수냐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진보나 보수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제 공부가 부족합니다. 그저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합리성이 가져왔던 동전의 양면을 볼 때 어두운 부분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금융위기를 만들어 냈던 것도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지 않은 합리성을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단순 인성교육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동양철학, 정확히 이야기해서 동아시아 철학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서구문명으로 대표되는 합리성과 동양철학으로 대표되는 진리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동도서기'와 같은 아큐장전이나 우월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할 정도로 모든 것을 알고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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